쓰지 않으면 쓰다







언제나 잘 준비는 되어있다.


20. Oct. 2017
20:36
Rietz-Neuendorf



나는 언제든 잘 준비가 되어있다. 언제 졸릴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긴장을 늦출 수 없다. 먼 곳을 가야 할 경우 재빨리 빈자리를 찾아 책을 펼친다. 내용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아도 상관없다. 졸음이 쏟아지도록 글씨는 작고, 행간은 좁고, 어려운 내용을 선호한다.


철없던 시절에는 잠을 귀찮게 여길 때도 있었다. 언젠가 ‘일생의 절반을 잠으로 소비한다’는 기사를 읽은 다음이었나 보다. 자는 데에 쓰이는 시간이 너무 아깝다 생각했다. 하긴 저런 생각을 하던 당시의 나는 지금보다 훨씬 어렸고, 비교적 건강했고, 잠을 아껴서라도 더 하고 싶은 일이 있었고, 그만큼 시간과 정성을 쏟아야만 뭐라도 된다 믿었다. 정말 철이 없었던 시절이었나 보다. 잠을 마다하고 다른 걸 하다니.

요새 내게는 잠만큼 좋은 게 없다. 잠은 늘 새롭다. 자기 전의 나와 자고 일어난 후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괴로움, 즐거움, 슬픔, 배고픔과 피로 따위 모두 자고 일어나면 딱 적당한 수준으로 가라앉거나 사라졌다. 아쉬운 거라면 잠에서 깨어났다는 것뿐, 자기 전의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적은 별로 없었다. 하긴, 나는 과거를 그리워하기보다는 늘 미래를 궁금해하는 사람이니까 하루라도 빨리 시간이 가길 바랐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잠은 가장 빠르고 안락하게 나를 미래로 데려가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예전 직장에서는 일하러 오는 거냐 자러 오는 거냐 늘 핀잔을 들었고, 버스에서 데굴데굴 구른 적도 있고, 두세 정거장쯤 지나치거나 종점에서 종점으로 몇 번이나 왕복기도 했다. 늦은 밤 전철에서 잠들었다가 핸드폰을 빼앗길 뻔한 경험도 있다. 험상궂은 젊은이들이 내 옆, 앞을 둘러싸고 앉아 손 안의 핸드폰(당시 최신 기종이라 갖다 팔면 돈깨나 됐을 것이다)을 훔쳐 가려고 노려보던 찰나 눈이 번쩍 뜨여서 험한 꼴은 면할 수 있었다.

실은 누구에게도 말 한 적 없지만, 지금까지 핸드폰, 현금, 이어폰 등 이것저것 골고루 한 번씩은 잃어버린 경험이 있다. 그렇지만 당시의 잠들었던 나를 절대 탓할 생각은 없다. 오히려 위로하고 싶다. 매일 졸았어도 직장에서 잘리지 않았던 이유는 내가 일을 잘했기 때문이다. 버스 기사 아저씨가 급정거하는 바람에 꼴사납게 데굴데굴 굴렀을 뿐이다. 두세 정거장을 지나치거나 종점과 종점을 왕복했어도 약속 시각에는 늦은 적이 없고, 내 돈과 핸드폰을 훔쳐 간 도둑놈이 나쁜 거다. 잠든 내 잘못은 아니다.

나는 정말 틈나는 대로,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자고 싶다. 다른 것과 바꿀 수 없다. 아니, 오히려 바꿀 수 있으면 좋겠다. 뭔가를 대가로 내고 잠을 살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 꿈 따위 꾸지 않아도 좋다. 알람 따위 맞춰놓고 싶지 않다. 졸리기만 하다면 언제든 잘 준비는 되어있다. 하지만 그때가 언제, 어떻게 다가올지 알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온 신경을 집중한 채 잠이 올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다.








열 세 번째 면접


17. Dez. 2013
19:21
Auguststr., 10117 Berlin



방금 지난주인가 지지난 주인가 지원했던 한 회사로부터 면접 가능 여부를 최대한 빨리 알려달라는 독촉 메일을 받았다. 내가 놓친 메일이 있었던가? 메일함을 검색해 보니 이번 달에 보낸 지원서만 50여 통, 그중 대부분은 ‘안타깝게도….’라고 시작하는 답장으로 끝나 있었다. 면접까지 이어진 경우가 아예 없진 않았지만, 아직 면접 이상의 결과를 내고 있지 못했다.

‘친애하는 xx님, 답장에 감사드립니다....면접은 언제든 가능합니다. 적절한 시간을 알려주시면 제가 맞추도록 하겠습니다... 필요한 서류나 기타 자료를 알려주시면 지참하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xx님,

귀사의 면접에 참여할 기회를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면접일에 뵙겠습니다. 필요한 서류나 자료를 알려주시면 지참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 버전으로 미리 준비해 둔 답장이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좀 더 신경을 쓴 티를 내고 싶어 처음부터 새로 썼다. 너무 경솔해 보이지는 않을까, 행여나 좋지 않은 인상을 줄까 최대한 정중하면서도 새로운 표현을 쓰기 위해 애썼다. 맞춤법도 몇 번이나 확인했다. 전송 버튼을 누르고 나서도 어디 한 군데라도 틀린 게 없는지 읽고 또 읽었다. 그래봐야 단 네 줄 뿐이었는데.

지원서에 남겨진 링크를 타고, 구직 사이트에 저장해 둔 구인 게시글을 다시 찾아 읽었다.

‘성실하고 열정적인 새 동료를 구합니다.’

‘커뮤니케이션, 협업, 동료 의식.’

‘훌륭한 워크-라이프-밸런스.’

‘중심지에 위치한 멋진 일터.’

게시글 왼쪽은 현대적이고 진보적인 회사라는 점을 홍보하려는 문구들로 가득한 반면 게시글 오른편은 구멍이 숭숭 뚫린 별 모양 아이콘이 가득했다. 유료 사용자들을 위해 구직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익명의 전, 현직 근무자들이 남긴 회사의 평판과 별점이었다.

‘규율이 잘 잡혀있다’  3.8

‘고리타분하다’ 2.5

‘솔직히 말하자면 꼰대들 천지’ 1.2

‘상명하복, 경직된 수직적 구조’  2.5

별점은 5점 만점에 2.5. 갑자기 의심이 몰려왔다. 부정적인 후기를 읽어서일까, 그동안 계속 탈락만 해서 자신감이 떨어졌나. 지원자가 없거나 기준 미달이었던 탓에 돌고 돌아 내게 온 차례가 아닐까.

자기소개서에 뭐라고 썼더라.

‘저는 귀사에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귀사에서 요구하는 인재는 바로 접니다.’

‘제가 기꺼이 하고 싶고, 지금까지 해왔던, 제가 가장 잘하는 일입니다.’

‘자신 있습니다.’

최대한 긍정적으로, 하지만 겸손하게 문장을 꾸렸다. 몇몇 단어만 바꿔 여러 회사에 지원했기 때문에 솔직히 헷갈리기는 했다. 그래도 인터뷰에 앞서 최소한 지원했던 회사, 부서, 담당자 이름은 외워갔다. 내가 어떤 인간인 척, 뭐라 아부를 떨었는지 정도는 알아야 했으니까.

면접 시간은 오후 3시였으나 성실하고 준비된 사람이라는 첫인상을 주는 것이 중요하므로 2시 45분에 도착했다. 그러나 보안 검사를 받느라 30분이나 걸릴 줄 몰랐다. 방문자 전용 출입구에 들어서자 ‘모든 방문객은 건물 출입용 임시 신분증이 필요하다’며 유리 벽 너머의 남자가 마이크를 통해 말했다. 내 신분증을 철제 서랍에 넣어 제출하고, ATM 비스름한 기계 앞에 서자 웹캠 같은 카메라가 위아래로 움직이더니 눈높이쯤에서 신호도 없이 내 얼굴을 찍었다. 눈을 감았거나, 반쯤 떴거나, 흔들렸거나, 입을 움직인 사진이 화면을 채우고 있었다. 그다음 딱딱한 철제 키보드를 눌러 생년월일, 주소, 국적, 이메일 주소, 전화번호까지 입력해야만 했다. 백스페이스키가 먹통이라 아예 처음부터 몇 번이나 새로 입력해야만 했다. 한 글자, 한 글자를 신중하게 꾹꾹 누르는 수밖에 없었다.

남자는 내 일거수일투족을 확인하고는 입력한 정보가 인쇄된 A4 용지와 여권을 철제 서랍에 넣어 내게 도로 건네주었다. ‘입력한 모든 정보는 사실이며, 개인 정보 제공에 동의한다’는 경고문인지 안내문인지 모를 문장 옆에 서명을 할 수밖에 없었다.

서명한 종이를 철제 서랍에 넣어 돌려주니, 잠시 후 홀로그램 처리가 된 플라스틱 카드가 되어 나왔다. 임시 보안카드 치고 너무 화려한 거 아닌가? 대체 무슨 회사길래 이렇게까지 하나 싶었다. 게다가 하필 가장 못생긴, 나와 전혀 닮지 않은 사진이 박혀있어 신분증이라고 하기엔 좀 어려워 보였다.

‘그저 저기서 찍은 사진이면 되나?’

출입문이 열리자 나를 마중 나온 듯 한, 키가 작은 금발의 백인 여성이 보였다. 발급받은 신분증을 만지작거리며 꺼내려던 찰나,

‘오늘 면접을 진행할 W입니다.’

그녀는 활짝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레이스 장식이 좀 요란한 연핑크 색의 시폰 블라우스와 베이지색 H라인 스커트가 무난하게 잘 어울렸다. 허겁지겁 악수를 나누고 그녀를 따라 면접실로 향했다. 깨끗하고 반듯한 블라우스 앞면에 비해 잔뜩 구겨진 등판이 눈에 띄었다.

면접실은 방음 처리가 되어 너무나 조용했다. 아주 사무적으로 물을 권하기에 아주 가식적으로 정중하게 거절했다. 두 번째 면접관이 왔다. 두 번째 면접관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키가 크고, 꽤 고급스러워 보이는 검정 새틴 원피스와 하이힐을 신은 금발의 백인 여성이 자신을 F라고 소개하며 자리에 앉았다. 손에는 회사 로고가 큼지막하게 박힌 파일을 들고 있었다.

‘저 안에 내가 켜켜이 들어있겠지.’

F 씨는 12년, W 씨는 4년째 마케팅 및 커뮤니케이션 부서에서 일하고 있고, F 씨는 늘 자기가 신입사원을 뽑는다는 말로 자기소개를 마쳤다. 그리고 내게 자기소개를 시켰다. F 씨는 내 눈을 계속 보고 있었고, W 씨는 파일을 뒤적이며 내가 하는 말이 서류와 일치하는지 점검하는 것 같았다. F 씨가 가진 내 이력서는 컬러 단면인쇄였고, W 씨가 가진 이력서는 흑백 양면인쇄였다.

그간의 면접 경험으로 지난 경력부터 앞으로 포부까지 막힘없이 술술 말할 수 있었지만, 긴장한 탓인지 말을 조금 더듬었다. 최대한 올바른 문법으로 똑 부러지는 문장으로 말하고 싶었지만 몇 번의 실수가 있었다. ‘약간 허술한 편이 인간적이고 친근해 보인다’는 조언을 되뇌며 애써 스스로를 달랬다.

어색한 침묵의 시간이 흐르고, 그들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알맹이 없는 질문만 해댔다. 각자 독일과 한국의 정치 상황을 한탄하며 적당히 웃다가, 난데없이 북한을 어떻게 생각하냐 묻더니, 비빔밥인지 스시인지 ‘아시안’ 레스토랑 추천을 해달라는 얘기가 나왔을 때, 면접 시간은 이미 40분을 넘기고 있었다. 지금까지 보았던 면접 가운데 가장 긴 면접이었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솔직히 비빔밥, 김정은, 프라우 메르켈이든 뭐든, 어떤 질문에도, 어떤 화제에도 얼마든지 대꾸할 준비는 되어있었다. 저런 알맹이 없는 질문에 걸맞은 재치 있는 대답 대여섯 개는 늘 준비하고 살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토록 싫어하는 파워포인트 프레젠테이션 업무도 좋아하는 척, 웃으면서 ‘잘할 수 있고, 잘해왔습니다.’라고 말했다.

‘솔직히 나 ppt 잘하잖아. 하면 되지.’

하지만 내가 줄곧 불안하고 언짢았던 이유는 호들갑 떨며 만들었더니 한 번도 쓸 일 없었던 임시 신분증이나, W 씨와 F 씨가 시종일관 손으로 가린 채 무언가를 쓰는 동안 흐르던 어색하고 차가운 침묵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은 내 포트폴리오 작업물에 대해 단 한 번도 묻지 않았고, 끝끝내 내게 희망 급여를 묻지 않았다. 만나서 반가웠다는 말도 없었고, 다음 면접 날짜도 없었다. 그게 ‘당신을 뽑지 않겠습니다’ 혹은 ‘안타깝게도 면접에서 탈락하셨습니다’라는 대답이나 마찬가지라는 건, 이번 달에만 열두 번이나이나 떨어진 면접에서 충분히 배운 터였다.

배웅해 주던 W 씨와 마지막 악수를 할 때, 그녀는 나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활짝 웃지 않았다. 더는 볼 사이도 아니고, 서로 가식 떨 필요도 없으니 본심이 드러났던 순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문득 돌아서는 W 씨를 붙들고 합격 여부를 떠나 솔직히 묻고 싶었다.

임시 신분증은 왜 만든 거죠?

아까 F 씨와 W 씨가 저에 대해 쓴 내용은 대체 뭔가요?

저의 대답이 이상했나요? 아니면 제 능력이 부족했나요?

면접에서 떨어진 이유가 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제가 어떤 사람인지 좀 알 것 같나요?





낡은 삶, 새 죽음


08. Apr. 2023
17:24
Berlin


파리를 죽였다. 창문 밖으로 몰아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죽였다.

손을 휘젓는 온건한 방법으로는 파리를 바꿀 수 없었다. 온건한 손길이 닿지않는 곳까지 달아난 파리를 몰아내기 위해 나는 더 길고 단단한 도구를 사용한다. 빠르고 강하게 휘두른다.

죽으세요. 아니, 됐고, 죽으세요.

파리의 검은 몸이 산산히 터져나가 흰 벽에 검고 붉은 흔적이 들러붙었다. 파리의 죽음은 나의 편안함보다 못하다. 다른 존재의 고통을 느낄 수 없으니 나는 그들을 죽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파리처럼 산산조각나 죽을 수도 있다. 내가 파리를 부순 것처럼 나 역시 누군가로부터 부서질 수 있다. ‘죽을듯한 고통’이라는 말은 거짓이다. 죽음의 고통을 느낀다면 죽는 것이다. 그 어떤 고통도 죽음에 준하지 않는다.

파리를 죽인 방법으로 나 역시 똑같이 죽어야 한다면 그 죽음을 받아들이겠다. 그러나 내가 부순 것들도 내가 같은 고통과 괴로움을 겪어한다면, 모든 이가 자신이 죽이고 부숴뜨린 것과 같은 고통과 죽음을 겪어야 한다면 누가 자신을 위해 다른 존재를 죽이려 할까. 누구도 무엇을 고통스럽게 하지 않는 세상은 공평할까. 누가 가장 고통스러울까. 가장 마지막에 남는 이가 가장 고통스러울까. 누가 가장 편안할까. 가장 먼저 죽은 이가 가장 편안할까.

자신으로 인해 생겨난 다른 존재의 고통을 느낄 수 있다면, 모든 인간은 그 어미가 겪은 출산의 고통을 가장 먼저 껴안아야 할 것이다. 갓난아기가 그런 고통을 느낀다면 살아남을수 있을까. 운좋게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자라나며 먹게될 것들의 죽음을 그대로 느낀다면 미치지 않을 수 있을까. 미치지 않고 자라 성인이 된 인간은 탄생의 고통부터 살기위해 죽여온 다른 존재의 고통을 기억할까. 고통을 기억하는 인간은 과연 다른 존재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살아가려고 할까.

우리는 자신의 죽음을 느끼지 못한다. 자신의 고통만큼 다른 존재의 고통을, 죽음을 기억하지 않는다. 당장 주위를 둘러보라. 동물과 식물의 시체가 알맞은 모양새로 산 것들을 감싸고 있다. 우리 주변은 온갖 시체로 가득하다. 우리는 시체 안에서 행복하다.


죽음은 항상 새롭고
삶은 항상 낡았다.

죽음을 경험한 글은 없지만
삶을 경험한 글은 무수히 많다.

경험된 죽음은 없지만
삶은 자체가 무수한 경험이다.

삶은 다양하다.
그러나 죽음은 다양한가?






엄지를 감아쥐며


08. Apr. 2023
17:48
Berlin


외투를 입어야 하는 계절이 오면 웃옷 주머니에, 더운 여름에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걷는다. 주머니에는 늘 손가락 굵기만 한 무언가를 넣어둔다. 무언가를 감아쥘만한 게 없다면 불안감이 커진다. 립밤이나 라이터 같은 것. 양쪽에 다 넣고 다닐 필요는 없고, 그저 한쪽이면 된다. 아무것도 쥘 것이 없다면 궁여지책으로 엄지를 감아쥔다.

어쩌다 누군가의 손가락을 잡고 걸을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보통은 혼자다. 그러므로 저런 호사에 익숙해지지 않으려 한다. 부드럽고 따뜻한 손가락에 익숙해지면, 누군가를 붙잡지 않고 걸을 수 없게 된다.

둥근 라이터는 길이나 굵기가 적당한 대신 부싯돌을 자꾸 조금씩 돌리게 되고, 갑자기 주머니 속에서 불이 나 겉옷이 타오를지도 모른다는 이상한 상상을 부추긴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립밤을 선호하는 편이다. 추운 겨울에 립밤을 쥐고 걸으면 딱딱해진 립밤으로 입술을 문대듯 바르지 않아도 되니 일석이조다. 적당히 따뜻해진 립밤이 부드럽게 녹아 발림이 좋다. 하지만 손이 차가울 땐 이마저도 통하지 않는다. 그럴 땐 바지 주머니에 넣어둔다. 웃옷 주머니 보다 바지 주머니 쪽이 더 따뜻하니까.

엄지를 감아쥐기 시작한 건, 아마 한동안 담배도 피우지 않고 립밤을 잊고 외출했을 때 생긴 버릇인 것 같다. 어쩌다 손을 다쳐 엄지를 쥘 수 없을 때도 있다. 이럴 땐 조금 어색하지만 검지라도 감아쥐어야 한다. 말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검지도 감아쥘 수 있다. 어떻게든 무엇이든 감싸 쥐겠다는 의지만 있으면 뭐든 쥘 수 있다.

온갖 인상을 쓰고 우직하게 뚜벅뚜벅 걷는 나는, 실은 무서운 표정을 짓는 게 아니라 불안함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주머니 안에 엄지를 감아쥐고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것이다. 투명한 주머니가 달린 옷을 입어야 한다면 꽤나 볼썽사나운 웃음거리가 되겠지.




닿음


22. Oct. 2015
14:45
Berlin


‘닿음’은 한 사람이 세상 밖으로 나오기 전부터 시작된다. 좀 더 과격하게 말하자면, 당신이 살아있음을 느끼는 순간부터 ‘닿음’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 ‘항시 무언가에 닿아있음’이 주는 안정감이란 삶과 죽음을 구분하는 지표가 된다. ‘더 이상 닿음이 존재하지 않음’을 느끼는 순간, 당신은 확실히 죽은 것이다. 이처럼 ‘닿음’은 삶과, 죽음과 닿아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이 분명히 느낄 수 있는 ‘닿음'은 그보다 훨씬 개인적이다. 앉거나 눕거나 걸을 때 보다 누군가와의 포옹에서 느껴지는 친밀한 압력과 온기가 천천히 가슴에서 어깨를 지나 등으로 이어지면 시간은 천천히 흐르고, 스르르 눈이 감긴다. 상대방이 그보다 더 큰 압력을 오랫동안 가한다면, 그러니까 당신을 더 꽉 안아준다면, 당신을 향한 반가움이 크다는 뜻일 수도 있고, 더 깊은 애정을 나타내고 싶은 마음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낯선 이 가 주는 압력은 크던 작던, 당신의 어떤 신체부위에 가해졌느냐를 떠나 위협으로 혹은 불쾌감으로 다가온다. ‘닿음’은 인간의 감정에서 큰 부분을 차지할 뿐 아니라, 언어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풍부하며, 때로는 불가사의할 정도로 정확하다.

‘친밀한 사람들과의 닿음'은 인간이 이 행성 어디로든 갈 수 있게 되자 물리적인 영역에서 심리적인 영역으로 확장되었다. 엄연히 따지자면 실제로 ‘닿아있지’ 않고 ‘연결되어’ 있을 뿐이지만, 어느새 익숙해진 사람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닿아 있음’으로 여기자는 약속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렇게 누군가의 따뜻하고 애정 어린 손길 없이도, 화면 위에 떠오르는 몇 개의 단어가 당신을 웃음 짓게 만들 수 있다. 당신 역시 손 끝에 힘을 주고 화면의 정해진 곳을 재빨리 ‘터치'하면, 저 먼 곳으로 순식간에 당신의 마음을 전할 수 있다. 하나 손 안의 작은 화면 아래에서 눈 깜짝할 새에 수만수억의 과정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는 해도, 서로의 따스한 온기를 전해주지는 못한다.

공간을 뛰어넘은 ‘연결'이 가능하다니 아직도 꿈을 꾸는 듯하다. ‘연결'은 내가 외로움에 질식하지 않고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인공호흡기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따스한 온기가, 익숙한 촉감이, 친밀한 압력을 그리워할 수밖에 없다. 꽉 안겼을 때의 온기와 애정을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는 작고 단단한 장치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설령 미래에서 그런 장치를 가져온다 해도 내 그리움을 채울 수는 없다. 복제된 ‘닿음'은 오히려 그 원본의 부재를 더욱 크게 만들 테니까. ‘친밀한 닿음’은 내 외로움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자 나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없는, 외부에서 채워야 하는 영구한 결핍으로, ‘닿음'을 느끼지 못하는 순간이 찾아오기 전까지 계속 갈구하게 될 것이다.








기내식 단상


21. Nov. 2016
01:01
Berlin


식전주로 방금 세 번째 와인을 비웠다. 기내용 와인은 양이 적어 세 병 정도로는 많이 취하지 않는다.

이륙 전 마스크와 장갑으로 무장한 승무원들이 승객들 머리 위로 살균 스프레이를 뿌리며 지나갔었다. 아직도 공기를 떠돌고 있는 스프레이의 라벤더 향이 그 순간을 계속 생각나게 한다. 승객 모두를 잠재적 보균자로 취급하는 무례함이란.

기내식이 나왔다. “치킨? 피시?” 나는 생선을 골랐다. 흰 밥, 너무 익은 시금치, 흰 살 생선 토막. 축축하고 퍼석한 밥은 얼렸다 녹인 것 같고, 시금치는 밭에서 따온 지 한 10여 년은 된 것 같은 색이었다. 생선은 밥만큼 많았는데, 간이 거의 안 되어 있었다. 굽거나 그을린 흔적이 없는, 고온으로 찐 흰 살 큰 한 토막. 착실히 제거된 뼈. 철저한 연구를 통해 최적의 방법을 찾아 적용한 최신 뼈 뽑는 기계라도 있는 걸까. 기가 막히군. 잔뼈 하나 없네. 애초부터 이 모양대로 태어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빵의 윗면은 너무 매끈해서 강가에 두면 조약돌과 구분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혹시나 해서 반으로 갈라보니 갈라졌다. 빵이 맞긴 맞는구나. 버터는 딱 이만큼만 먹으라는 법으로 정해진 것처럼 생겼다. 금박 포장지 겉면에 작은 물방울들이 맺혀있었다. 포장지는 성의 없이 푸른 산등성이에 나무 같지도 않은 나무, 새끼손톱만 소 따위를 그려놓았다. '짜잔, 실은 소가 아니라 다른 동물이었습니다'라고 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조악한 그림이었다. 뭣보다 너무 차갑고 단단해서 영원히 녹지 않을 것 같았다. 조용히 빵을 내려놓았다.

디저트로 티라미수가 남았다.

한 변이 검지 길이 정도 되는 정삼각형, 검지 한마디 정도의 높이, 빵 위에 크림, 크림 위에 깨끗이 뿌려진 코코아 파우더, 그 위에 선심 쓰듯 올려진 정사각형 초콜릿 한 조각. 겉모습은 정말이지 완벽한 티라미수였다. 종이 맛이 나던 밥, 오래된 시금치, 생명이 느껴지지 않던 생선토막이 '어쩔 수 없어'였다면, 이 티라미수는 '좋아 이거야'라고 할만했다.

이 아름다운 직각 절단면을 해치지 않고 깔끔하게 먹는 방법은 무엇일까. 꼭짓점 먼저 정확한 크기로 해치우고, 남은 조각을 끝내는 편이 가장 좋겠지. 그러나 한쪽으로 치우친 초콜릿이 정확한 비율을 가늠하는 데에 방해가 됐다. 몇 번의 가늠 끝에 조심스러운 첫 꼭짓점 절단을 마쳤다. 잘린 부분은 잘리기 전처럼 직각의 날카로운 면이 살아있었다. 만족스럽군.

입 안에서 느껴지는 맛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자연산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향이 없는 코코아 파우더의 쓴맛, 물을 적게 타서 녹인 인스턴트커피맛, 스펀지케이크의 구워진 탄수화물맛, 특별할 것 없는 설탕시럽의 단맛, 마스카포네 치즈인 척하며 정체를 밝히지 않는 유지방의 느끼함. 순서는 그렇다 치고, 솔직히 비율이 꽤 괜찮았다. 시럽의 적절한 수분이 크림과 빵의 경계선을 지운다. 쓴맛은 단맛을 당기고, 단맛은 쓴맛을 지운다. 나쁘지 않군.

하필 세 번째 꼭짓점을 자를 때 난기류를 만나 절단면이 뭉개졌다. 티라미수는 이제 한쪽 귀퉁이가 찌그러진 갈색 교통 표지판처럼 되어버렸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가운데 초콜릿이 박혀있다는 것 정도. 이 초콜릿을 어쩌지. 너무 단 초콜릿이라면 혀가 둔해질 텐데. 그러면 티라미수를 먹을 때 쓴맛밖에 안 날 텐데. 먹을지, 버릴지 결단을 내려야 했다.

초콜릿이 너무 달지 않기만을 바라며 한입에 털어 넣었다. 혹시라도 이에 끼지 않도록 씹지 않고 시간을 들여 천천히 녹였다. 다행히 너무 달지는 않았다. 오히려 별 맛이 나지 않아 실망스러울 정도였다. 초콜릿이 있던 자리 아래로 흰 유지방이 보였다. 잠깐이지만 껍질을 벗긴 우엉 생각이 났다. 남은 티라미수는 한 입에 넣기엔 컸지만, 더 자르다가는 완전히 뭉개질 것 같다. 이제 초콜릿도 없으니 극적인 맛의 변화는 없겠지.

하지만 이 티라미수를 설계한 이들은 나의 모든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남은 티라미수를 즐겁게 먹을 수 있도록 커스터드 크림을 얇게 깔아 두었다. 절묘하군, 절묘해. 나지막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하-.

'치워드릴까요?'

아까 내 옆에서 살균 스프레이를 뿌렸던 승무원이었다.

'아뇨. 아직…. 와인 한 병만 주세요.'

그가 와인을 건넬 때 따라온 라벤더 냄새가 불쾌했다. 그래. 이 비행기의 모든 건 겉으로만 배려하는 척할 뿐, 실은 전혀 아니지. 티라미수를 설계한 사람이 '더 얇게! 더 싸게!'를 외치며 크림의 양을 계산하는 모습을 상상하자, 얇디얇은 커스터드 크림이 갑자기 미워졌다. 그 절묘함을 더는 칭찬하고 싶지 않아 졌다. 나는 스푼을 내려놓았다. 남은 티라미수 조각은 먹어도 그만, 안 먹어도 그만인 음식과 쓰레기의 경계에 있었다.

그놈의 스프레이 좀 뿌린다고 뭐가 얼마나 깨끗해질지는 모르겠지만, 내 기분만큼은 오히려 지저분해졌다. 아무리 라벤더 향을 뒤집어쓴다고 한들,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잘게 쪼갠다 한들, 무례함은 사라지지 않고 이 밀실의 공기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나는 네 병째 와인을 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