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지 않으면 쓰다
언제나 잘 준비는 되어있다.
20. Oct. 2017
20:36
Rietz-Neuendor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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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Oct. 2017
20:36
Rietz-Neuendorf

나는 언제든 잘 준비가 되어있다. 언제 졸릴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긴장을 늦출 수 없다. 먼 곳을 가야 할 경우 재빨리 빈 자리를 찾아 책을 펼친다. 내용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아도 상관없다. 졸음이 쏟아지도록 글씨는 작고, 행간은 좁고, 어려운 내용을 선호한다.
철없던 시절에는 잠을 귀찮게 여길 때도 있었다. 언젠가 ‘일생의 절반을 잠으로 소비한다’는 기사를 읽은 다음이었나보다. 자는데에 쓰이는 시간이 너무 아깝다 생각했다. 하긴 저런 생각을 하던 당시의 나는 지금보다 훨씬 어렸고, 비교적 건강했고, 잠을 아껴서라도 더 하고싶은 일이 있었고, 그만큼 시간과 정성을 쏟아야만 뭐라도 된다 믿었다. 정말 철이 없었던 시절이었나보다. 잠을 마다하고 다른 걸 하다니.
요새 내게는 잠만큼 좋은게 없다. 잠은 늘 새롭다. 자기 전의 나와 자고 일어난 후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괴로움, 즐거움, 슬픔, 배고픔과 피로 따위 모두 자고 일어나면 딱 적당한 수준으로 가라앉거나 사라졌다. 아쉬운 거라면 잠에서 깨어났다는 것뿐, 자기 전의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적은 별로 없었다. 하긴, 나는 과거를 그리워하기보다는 늘 미래를 궁금해하는 사람이니까 하루라도 빨리 시간이 가길 바랐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잠은 가장 빠르고 안락하게 나를 미래로 데려가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예전 직장에서는 일하러 오는 거냐 자러 오는 거냐 늘 핀잔을 들었고, 버스에서 데굴데굴 구른 적도 있고, 두세 정거장쯤 지나치거나 종점에서 종점으로 몇 번이나 왕복기도 했다. 늦은 밤 전철에서 잠들었다가 핸드폰을 빼앗길 뻔한 경험도 있다. 험상궂은 젊은이들이 내 옆, 앞을 둘러싸고 앉아 손안의 핸드폰(당시 최신 기종이라 갖다 팔면 돈깨나 됐을 것이다)을 훔쳐 가려고 노려보던 찰나 눈이 번쩍 뜨여서 험한 꼴은 면할 수 있었다. 실은 누구에게도 말 한 적 없지만, 지금까지 핸드폰, 현금, MP3P 까지 골고루 한 번씩은 잃어버린 경험이 있다. 그렇지만 나는 당시의 잠들었던 나를 절대 탓하지 않는다. 오히려 위로하고 싶다. 매일 졸았어도 직장에서 잘리지 않았던 이유는 내가 일을 잘했기 때문이며, 버스 기사 아저씨가 급정거하지 않았다면 구를 일은 없었을 테고, 두세 정거장을 지나치거나 종점과 종점을 왕복했어도 약속 시각에는 늦은 적이 없고, 내 핸드폰을 뺏으려 했던 놈들이 몹쓸 놈들이고, 내 돈과 MP3P를 훔쳐 간 도둑이 나쁜 것이지 잠든 내가 잘못한 것은 아니다.
나는 정말 틈나는 대로,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자고 싶다. 다른 것과 바꿀 수 없다. 아니, 오히려 바꿀 수 있으면 좋겠다. 뭔가를 대가로 내고 잠을 살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 꿈 따위 꾸지 않아도 좋다. 알람 따위 맞춰놓고 싶지 않다. 졸립기만 하다면 언제든 잘 준비는 되어있다. 하지만 그때가 언제, 어떻게 다가올지 알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긴장을 늦추지 온 신경을 집중한 채 잠이 올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다.
열 세 번째 면접
17. Dez. 2013
19:21
Auguststr., 10117 Berlin
17. Dez. 2013
19:21
Auguststr., 10117 Berlin
방금 지난주인가 지지난 주인가 지원했던 한 회사로부터 면접 가능 여부를 최대한 빨리 알려달라는 독촉 메일을 받았다. 내가 놓친 메일이 있었던가? 메일함을 검색해보니 이번 달에 보낸 지원서만 50여 통, 그중 대부분은 ‘안타깝게도….’라고 시작하는 답장으로 끝나 있었다. 면접까지 이어진 경우가 아예 없진 않았지만, 아직 면접 이상의 결과를 내고 있지 못했다.
‘친애하는 xx님, 답장에 감사드립니다....면접은 언제든 가능합니다. 적절한 시간을 알려주시면 제가 맞추도록 하겠습니다... 필요한 서류나 기타 자료를 알려주시면 지참하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xx님,
귀사의 면접에 참여할 기회를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면접일에 뵙겠습니다. 필요한 서류나 자료를 알려주시면 지참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 버전으로 미리 준비해둔 답장이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좀 더 신경을 쓴 티를 내고 싶어 처음부터 새로 썼다. 너무 경솔해 보이지는 않을까, 행여나 좋지 않은 인상을 줄까 최대한 정중하면서도 새로운 표현을 쓰기 위해 애썼다. 맞춤법도 몇 번이나 확인했다. 전송 버튼을 누르고 나서도 어디 한 군데라도 틀린 게 없는지 읽고 또 읽었다. 그래봐야 단 네 줄 뿐이었는데.
지원서에 남겨진 링크를 타고, 구직 사이트에 저장해 둔 구인 게시글을 다시 찾아 읽었다.
‘성실하고 열정적인 새 동료를 구합니다.’
‘커뮤니케이션, 협업, 동료 의식.’
‘훌륭한 워크-라이프-밸런스.’
‘중심지에 위치한 멋진 일터.’
게시글 왼쪽은 현대적이고 진보적인 회사라는 점을 홍보하려는 문구들로 가득한 반면 게시글 오른편은 구멍이 숭숭 뚫린 별 모양 아이콘이 가득했다. 유료 사용자들을 위해 구직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익명의 전, 현직 근무자들이 남긴 회사의 평판과 별점이었다.
‘규율이 잘 잡혀있다’ 3.8
‘고리타분하다’ 2.5
‘솔직히 말하자면 꼰대들 천지’ 1.2
‘상명하복, 경직된 수직적 구조’ 2.5
별점은 5점 만점에 2.5. 갑자기 의심이 몰려왔다. 부정적인 후기를 읽어서일까, 그동안 계속 탈락만 해서 자신감이 떨어졌나. 지원자가 없거나 기준 미달이었던 탓에 돌고 돌아 내게 온 차례가 아닐까.
자기소개서에 뭐라고 썼더라.
‘저는 귀사에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귀사에서 요구하는 인재는 바로 접니다.’
‘제가 기꺼이 하고 싶고, 지금까지 해왔던, 제가 가장 잘하는 일입니다.’
‘자신 있습니다.’
최대한 긍정적으로, 하지만 겸손하게 문장을 꾸렸다. 몇몇 단어만 바꿔 여러 회사에 지원했기 때문에 솔직히 헷갈리기는 했다. 그래도 인터뷰에 앞서 최소한 지원했던 회사, 부서, 담당자 이름은 외워갔다. 내가 어떤 인간인 척, 뭐라 아부를 떨었는지 정도는 알아야 했으니까.
면접 시간은 오후 3시였으나 성실하고 준비된 사람이라는 첫인상을 주는 것이 중요하므로 2시 45분에 도착했다. 그러나 보안 검사를 받느라 30분이나 걸릴줄 몰랐다. 방문자 전용 출입구에 들어서자 ‘모든 방문객은 건물 출입용 임시 신분증이 필요하다’며 유리 벽 너머의 남자가 마이크를 통해 말했다. 내 신분증을 철제 서랍에 넣어 제출하고, ATM 비스름한 기계 앞에 서자 웹캠 같은 카메라가 위아래로 움직이더니 눈높이쯤에서 신호도 없이 내 얼굴을 찍었다. 눈을 감았거나, 반쯤 떴거나, 흔들렸거나, 입을 움직인 사진이 화면을 채우고 있었다. 그 다음 딱딱한 철제 키보드를 눌러 생년월일, 주소, 국적, 이메일 주소, 전화번호까지 입력해야만 했다. 백스페이스키가 먹통이라 아예 처음부터 몇 번이나 새로 입력해야만 했다. 한 글자, 한 글자를 신중하게 꾹꾹 누르는 수 밖에 없었다.
남자는 내 일거수일투족을 확인하고는 입력한 정보가 인쇄된 A4 용지와 여권을 철제 서랍에 넣어 내게 도로 건네주었다. ‘입력한 모든 정보는 사실이며, 개인 정보 제공에 동의한다’는 경고문인지 안내문인지 모를 문장 옆에 서명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서명한 종이를 철제 서랍에 넣어 돌려주니, 잠시후 홀로그램 처리가 된 플라스틱 카드가 되어 나왔다. 임시 보안카드치고 너무 화려한 거 아닌가? 대체 무슨 회사길래 이렇게까지 하나 싶었다. 게다가 하필 가장 못생긴, 나와 전혀 닮지 않은 사진이 박혀있어 신분증이라고 하기엔 좀 어려워 보였다.
‘그저 저기서 찍은 사진이면 되나?’
출입문이 열리자 나를 마중 나온 듯 한, 키가 작은 금발의 백인 여성이 보였다. 발급받은 신분증을 만지작거리며 꺼내려던 찰나,
‘오늘 면접을 진행할 W입니다.’
그녀는 활짝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레이스 장식이 좀 요란한 연핑크 색의 쉬폰 블라우스와 베이지색 H라인 스커트가 무난하게 잘 어울렸다. 허겁지겁 악수를 나누고 그녀를 따라 면접실로 향했다. 깨끗하고 반듯한 블라우스 앞면에 비해 잔뜩 구겨진 등판이 눈에 띄었다.
면접실은 방음 처리가 되어 너무나 조용했다. 아주 사무적으로 물을 권하기에 아주 가식적으로 정중하게 거절했다. 두번째 면접관이 왔다. 두번째 면접관이 있는줄은 몰랐는데.
키가 크고, 꽤 고급스러워 보이는 검정 새틴 원피스와 하이힐을 신은 금발의 백인 여성이 자신을 F 라고 소개하며 자리에 앉았다. 손에는 회사 로고가 큼지막하게 박힌 파일을 들고 있었다.
‘저 안에 내가 켜켜이 들어있겠지.’
F 씨는 12년, W 씨는 4년째 마케팅 및 커뮤니케이션 부서에서 일하고 있고, F 씨는 늘 자기가 신입사원을 뽑는다는 말로 자기소개를 마쳤다. 그리고 내게 자기소개를 시켰다. F 씨는 내 눈을 계속 보고 있었고, W 씨는 파일을 뒤적이며 내가 하는 말이 서류와 일치하는지 점검하는 것 같았다. F 씨가 가진 내 이력서는 컬러 단면인쇄였고, W 씨가 가진 이력서는 흑백 양면인쇄였다.
그간의 면접 경험으로 지난 경력부터 앞으로 포부까지 막힘없이 술술 말할 수 있었지만, 긴장한 탓인지 말을 조금 더듬었다. 최대한 올바른 문법으로 똑 부러지는 문장으로 말하고 싶었지만 몇 번의 실수가 있었다. ‘약간 허술한 편이 인간적이고 친근해 보인다’는 조언을 되뇌며 애써 스스로를 달랬다.
어색한 침묵의 시간이 흐르고, 그들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알맹이 없는 질문만 해댔다. 각자 독일과 한국의 정치 상황을 한탄하며 적당히 웃다가, 난데없이 북한을 어떻게 생각하냐 묻더니, 비빔밥인지 스시인지 ‘아시안’ 레스토랑 추천을 해달라는 얘기가 나왔을 때, 면접 시간은 이미 40분을 넘기고 있었다. 지금까지 보았던 면접 가운데 가장 긴 면접이었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솔직히 비빔밥, 김정은, 프라우 메르켈이든 뭐든, 어떤 질문에도, 어떤 화제에도 얼마든지 대꾸할 준비는 되어있었다. 저런 알맹이 없는 질문에 걸맞는 재치 있는 대답 대여섯 개는 늘 준비하고 살 수 밖에 없었으니까. 그토록 싫어하는 파워포인트 프레젠테이션 업무도 좋아하는 척, 웃으면서 ‘잘 할 수 있고, 잘 해왔습니다.’라고 말했다.
‘솔직히 나 ppt 잘하잖아. 하면 되지.’
하지만 내가 줄곧 불안하고 언짢았던 이유는 호들갑 떨며 만들었더니 한 번도 쓸 일 없었던 임시 신분증이나, W 씨와 F 씨가 시종일관 손으로 가린 채 무언가를 쓰는 동안 흐르던 어색하고 차가운 침묵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은 내 포트폴리오 작업물에 대해 단 한 번도 묻지 않았고, 끝끝내 내게 희망 급여를 묻지 않았다. 만나서 반가웠다는 말도 없었고, 다음 면접 날짜도 없었다. 그게 ‘당신을 뽑지 않겠습니다’ 혹은 ‘안타깝게도 면접에서 탈락하셨습니다’라는 대답이나 마찬가지라는 건, 이번 달에만 열두 번이나이나 떨어진 면접에서 충분히 배운 터였다.
배웅해주던 W 씨와 마지막 악수를 할 때, 그녀는 나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활짝 웃지 않았다. 더는 볼 사이도 아니고, 서로 가식 떨 필요도 없으니 본심이 드러났던 순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문득 돌아서는 W 씨를 붙들고 합격 여부를 떠나 솔직히 묻고 싶었다.
임시 신분증은 왜 만든 거죠?
아까 F 씨와 W 씨가 저에 대해 쓴 내용은 대체 뭔가요?
저의 대답이 이상했나요? 아니면 제 능력이 부족했나요?
면접에서 떨어진 이유가 뭔지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제가 어떤 사람인지 좀 알 것 같나요?